"하나님과 씨름하는 우리"(We who wrestle with God) - 세미한 소리 Foreshadowing : The still, Small voice (2024)

This can well be considered a more powerful and justified argument than the now much more frequently used "argument from design" —the insistence that the complexity of nature necessarily indicates an active creator. In 1 and 2 Kings lays the revelatory groundwork for a much more psychological and relational definition of the Supreme Deity, detaching God from the pagan theater of the natural world (awe-inspiring as nature might indeed be) and placing Him, wonderfully and terribly, inside us all. It is Elijah's realization that sets the stage for the account of Jonah, as well— for the mysterious tale of the prophet who first rejects and then obeys the call of the still small voice, and whose exploits constitute the story that closes this volume. The fundamental and revolutionary importance of Elijah's contribution is signified by the miracle of his bodily assumption into heaven. This event, prefiguring Jonah's deliverance from the belly of the whale, as well as Christ's resurrection, indicates Elijah's unparalleled success as a prophet. The biblical texts and their characterization of God simply cannot be understood in the absence of appreciation for Elijah's unparalleled significance as a prophet and for the vital importance of his transformative and revolutionary realiza-tion. After encountering the story of Elijah, we perceive the nature of being-ours and that of the divine-differently, more clearly, and more directly and personally. Our eyes are opened and we can hear in a new way.

이는 오늘날 더 자주 사용되는 "설계론적 논증(argument from design)"보다 더 강력하고 정당한 논증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설계론적 논증은 자연의 복잡성이 반드시 창조주의 활동을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상열왕기하는 이를 넘어, 자연 세계의 경이로움과는 별개로, 신을 자연의 무대에서 분리시키고, 신성(神性)을 심오하게도 우리 모두의 내면에 위치시키는 더 심리적이고 관계적인 정의를 위한 계시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엘리야의 깨달음은 요나 이야기의 무대도 마련합니다. 이는 먼저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의 부름을 거부하고 나중에 이를 순종하게 되는 선지자의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요나의 행적은 이 이야기가 담긴 책의 끝을 장식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엘리야의 기여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이며, 그의 중요성은 그가 육체를 가진 채로 하늘로 승천하는 기적으로 상징됩니다. 이 사건은 요나가 물고기의 배 속에서 구원받는 사건과 예수의 부활을 예고하며, 엘리야가 선지자로서 이룬 비할 데 없는 성공을 나타냅니다.

성경 텍스트와 그 속의 하나님 묘사는 엘리야의 선지자로서의 비할 데 없는 중요성과 그의 변혁적이고 혁명적인 깨달음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를 접한 후, 우리는 존재의 본질—우리 자신의 본질과 신성의 본질—을 다르게, 더 명확하게, 더 직접적이고 개인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엘리야는 단순히 한 선지자에 그치지 않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한 중심적 인물로, 성경의 이야기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Why the story as the foundation even for the act of perception itself? Al-ternatively, for the transformation of the act of perception itself? Because the world has to be filtered through the mechanism of story to become comprehensible or even apprehensible; because the world is simply too complicated to attend to and to navigate within the absence of aim and character (which are defining features of story itself). An infinite plethora of facts present themselves, continually, for our consideration: one fact per phenomenon, perhaps, and more—a fact not only for every phenomenon but for all their possible combinations. That is simply too many facts. The same problem obtains with regard to outcomes: every action, every possible cause, produces an exponential branching of effects— far too many to contemplate, consider, and take into account. This is an intractable problem; something that phi losopher Daniel C. Dennett famously characterized as "a new, deep epistemological problem." There are a near-infinite number of ways to categorize— hence, to perceive—a finite number of objects. We do not and cannot attend with equal devotion to everything occurring always and everywhere around us. Instead, with every glance, we prioritize the facts. In doing so, we attend to very little and ignore much. We do so in keeping with our aim. We do so to gain what we need and want—but what is that? It might be the foolishness of our momentary whim, when we are or have remained infantile, or childish, and oriented toward the immediate gratification of our desires. It might be our desire to obtain the power that makes such gratification possible despite the presence or even objections of the others we are forced to contend with as we navigate forward. It might instead be mature establishment of the ties that bind and give true meaning to our lives—the ties of marriage, family, friendship, trade, and state. Perhaps, as well, it is the harmonious and productive integration of present and future in the autonomous individual that makes up true maturity and responsible conduct, both cooperative and com-petitive.

왜 이야기가 지각(perception) 행위 자체의 기초가 될까요? 혹은 지각 행위의 변화를 위한 기초가 될까요? 그것은 세계가 이야기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여과되지 않으면 이해 가능하거나 심지어 인지 가능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너무 복잡해서 목표와 성격(이야기의 본질적 특징)이 없이는 주의를 기울이거나 탐색할 수 없습니다.

무한에 가까운 사실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아마도 한 현상마다 하나의 사실이 있을 것이고, 그 이상의 사실도 있을 것입니다—모든 현상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모든 가능한 조합에 대한 사실도 포함됩니다. 이는 너무 많은 정보입니다. 결과와 관련해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행동, 모든 가능한 원인은 결과의 기하급수적 가지치기를 만들어냅니다—이 역시 고려하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이 문제는 풀 수 없는 문제로, 철학자 다니엘 C. 데넷(Daniel C. Dennett)이 "새롭고 심오한 인식론적 문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유한한 수의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은 거의 무한히 많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항상,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모든 것에 동등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매 순간 우선순위를 정하며 지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주 적은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대부분을 무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에 따라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유아적이거나 어린아이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순간적인 욕망의 충족을 향한 어리석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며 마주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권력을 얻으려는 욕망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것은 결혼, 가족, 우정, 거래, 국가와 같은, 우리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대 관계를 성숙하게 구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현재와 미래를 조화롭고 생산적으로 통합하는 자율적인 개인의 성숙함일 수 있습니다. 이는 협력적이면서도 경쟁적인, 책임감 있는 행동을 구성하는 진정한 성숙함이자 책임감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We weigh the facts we encounter in accordance with our values. We elevate some pathways forward, things in the world, and people to a higher place than others, consigning everything deemed lesser to the netherworld of impediment, obstacle, enemy, or foe, or to the invisible domain of irrele-vance. Thus we order, simplify, and reduce the world, prior even to encountering it. This prioritizing is not merely a passive process. It is, instead, an active giving up, offering, or sacrifice. We are not the submissive receivers of simply self-evident truths. Every perception is an effort as much as it is a sensation. Every perception requires the movement of eyes, the inquiry of fingers, or the direction of hearing. Everything we experience is irreducibly dependent upon motivation and action instead of reflexively sensory-with sensation therefore never occurring simply prior to action. Whatever occupies our attention —whatever we are conscious of, however briefly-is thus something elevated for the moment to the highest place, celebrated and wor-shipped, whether we know it or not. We must specify what is most valuable, currently, and not anything and everything else, even to see. Those elements of momentary, even pinpoint, attention are in turn themselves organized more or less coherently (depending on the degree of our integrity) into a pyramidal structure of worth. That structure, moreover, is either one with something at the top—our ultimate aim—or is the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that cannot stand (Mark 3:25). We see the world through a hierarchy of value. This is the map we use to guide our navigation through the unknown territory in which we would otherwise be lost. We perceive, therefore, in accordance with our aim. That is a remarkable and insufficiently heralded real-ization, implying as it does nothing less than that both our misery and our joy depend on our values.

우리가 마주하는 사실들은 우리의 가치관에 따라 저울질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길이나 사물, 사람을 더 높은 위치로 올려놓으며, 그 외의 것들은 하찮다고 여겨 장애물, 적, 혹은 무관한 존재로 밀어내거나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간주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계를 체험하기도 전에 이미 질서를 부여하고, 단순화하며, 축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선순위 정하기는 단순히 수동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포기, 헌신, 또는 희생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자명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지각은 감각인 동시에 노력입니다. 모든 지각은 눈의 움직임, 손가락의 탐색, 혹은 귀의 집중 같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동기와 행동에 의존하며, 단순히 반사적인 감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감각은 결코 행동 이전에 단독으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무엇이 우리의 주의를 끌고, 무엇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가—비록 잠깐이라도—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간에, 순간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지고, 기념되고, 숭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으면, 심지어 볼 수도 없습니다.

순간적인 집중의 요소들은, 우리의 **성실성(integrity)**의 정도에 따라,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더 큰 가치의 피라미드 구조로 조직됩니다. 이 구조는 최상부에 궁극적 목표를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분열된 집은 설 수 없다" (마가복음 3:25)는 원리대로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가치의 위계(hierarchy of value)**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지도(map)**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목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는 놀랍고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통찰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고통과 기쁨이 우리의 가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We elevate what we most highly regard to the utmost place of supremacy or sovereignty. We aim at the upward target we deem central, however mo-mentarily. We bring our consciousness itself to bear on what we define as worthy of the expenditure of our attention and the efforts of our action. We begin our continual journey forward by positing a good—a good that is at least better than our point of departure. This is an act of faith as well as one of sacrifice: faith, because the good could be elsewhere; sacrifice, because in the pursuit of any particular good we determine to forgo all others. All of our perceptions are allies-"spiritual partners" —of our first and determining decision. Our aim delineates around us a moral landscape, with the destination we are striving toward serving as the highest imaginable good, at least for the time and place given relevance by our intent. Aim thereby gives the world its point, prioritizing and organizing even our perception of it. Consequently, we see laid before us the pathway forward, the route we perceive as most likely to lead us to where we have determined to go; we see what and who impedes our movement forward, and we despair; we see what and who aids us, and we hope.

우리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궁극적인 최고의 위치, 주권의 자리로 올려집니다. 우리는 순간적이라도 중심적이라고 여기는 상향의 목표를 겨냥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행동의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정의한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출발점을 상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믿음희생의 행위입니다. 믿음은, 그 선(good)이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희생은 특정한 선을 추구하면서 모든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기로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지각은 우리의 첫 번째 결정과 그것을 결정짓는 선택의 **동반자, 즉 ‘영적인 동반자’**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주변에 도덕적 풍경을 그려냅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최종 목적지는, 적어도 우리의 의도가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상상 가능한 가장 높은 선으로 작용합니다.

목표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목표는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까지도 우선순위를 정하고 조직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가기로 결정한 곳으로 가장 잘 이끌어줄 것으로 보이는 경로를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과 사람들을 보며 절망합니다. 반면, 우리를 돕는 것과 사람들을 보며 희망합니다.

이처럼, 목표는 단순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과 감정을 조직하며,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형성합니다.

Much of our communication is the description of aim. We tell other people what we are up to, and we expect and want them to tell us the same. We talk among ourselves, often shallowly, about just exactly what those we know are up to. What do they want? What are they attending to? How are they acting, in consequence? We begin to talk of character, rather than immediacy of aim, when we speak more deeply of such things, because character is nothing more than the habitual embodiment of aim. To know ourselves or others-that is to understand character. How do we go about acquiring and representing such knowledge? We act out, imitate, perform-dramatize-so we can represent and internalize the patterns of attention and action that characterize ourselves and other people. More abstractly: we tell a story. When we describe the aims of a person or a people, their pathway forward, the obstacles and opportunities that emerge on that journey, the friends and foes that accompany their movement-the moral landscape that emerges-we tell a story. In so doing, we prioritize, organize, and perceive the world. In that manner, we describe aim. We see the world in relationship to aim. What is a story, detailing aim and all of its consequences? A description of the structure through which we see the world. Stories reveal to us, in their various characterizations, the structures of worth within which the world makes itself manifest to our perception. Why does this matter? What does it signify? Why is it important—even vital? It is a terrible challenge to see and act in the world, in all its incomprehensible complexity. Thus, we value descriptions of how to perceive and behave-and perhaps more highly than we value anything else.

우리의 의사소통의 대부분은 목표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며, 그들 역시 우리에게 같은 것을 말해주길 기대하고 원합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하면서, 종종 피상적으로,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논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원하나요? 그들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나요? 그 결과로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나요?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더 깊이 이야기할 때, 목표의 즉시성보다 **성격(character)**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격이란 결국 목표의 습관적 구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아는 것—즉, 성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지식을 어떻게 얻고 표현할까요? 우리는 행동하며, 모방하고, 수행하며, 연극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주의와 행동을 특징짓는 패턴을 나타내고 내면화할 수 있습니다. 더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이야기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목표, 그들의 앞으로 나아가는 길, 여정에서 나타나는 장애물과 기회, 동료와 적들—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풍경을 묘사할 때, 우리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우선순위를 정하고, 조직하며, 지각합니다. 이 방식으로 우리는 목표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목표와 관련하여 세상을 봅니다.

이야기란 무엇일까요? 목표와 그 모든 결과를 상세히 묘사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구조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야기는 다양한 등장인물과 상황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틀 속에서 가치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중요한 것일까요—심지어 필수적일까요?

세상의 모든 이해할 수 없는 복잡성 속에서 보고 행동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지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어쩌면 그것을 무엇보다도 더 높이 평가합니다. 이야기는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니라, 우리가 혼란 속에서 방향을 찾도록 돕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We become engrossed in the stories we act out as children-stories we observe on the stage or screen, or read in the works of fiction, even as adults-because there is nothing we need to know more than how to con-struct, adjust, and improve the hierarchy of value within which the relevant facts of the world realize themselves. That is how we come to construct the world we occupy, existentially. That is how we make the reality we inhabit. That is how we navigate forward-and decide where forward itself lies. We watch the hero aiming upward, living in truth, sacrificing for what is better, struggling nobly against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yet maintaining his integrity. We watch the objects of the world reveal themselves to him as the tools and obstacles relevant to his journey. We watch the friends he meets along the way perform the sacrifices necessary to be of aid and are pleased to see it. We watch his foes cheat, steal, betray, lie, and fail, and we feel that justice has been served-or we watch them succeed, and we experience the moral outrage of the deceived. In short: we are entranced by those with lofty aims, and we wish, if we are brave, to be possessed by their spirit. We aim at their aims—or hope to-see what they see, experience the emotions they feel, and learn the lessons they learn, while safely ensconced in the world of the imaginary. That is the value of the fictional: it is where we experiment with value, while remaining secure. It is the place where the play that shapes our very perceptions can take place most safely and effectively.

우리는 어릴 때 연기하는 이야기들, 무대나 스크린에서 관찰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읽는 소설 속 이야기들에 몰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절실히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관련된 사실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가치의 위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조정하며, 개선할 것인가 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적으로 점유하는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창조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고, ‘앞으로’라는 방향 자체를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위로 향하는 목표를 겨냥하며 진실 속에서 살고, 더 나은 것을 위해 희생하며, 불운의 가혹한 공격에 맞서 고귀하게 투쟁하면서도 자신의 성실성을 유지하는 영웅을 봅니다. 우리는 그가 세상의 사물들을 자신의 여정과 관련된 도구와 장애물로서 인식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그가 여정에서 만난 친구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필요한 희생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그의 적들이 속이고, 훔치고, 배신하며, 거짓말하고 실패하는 것을 보며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느끼거나, 그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며 기만당한 분노를 경험합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고귀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에게 매료되며, 만약 우리가 용감하다면, 그들의 정신에 사로잡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목표를 목표로 삼고, 그들이 보는 것을 보고 싶어하며,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경험하고, 그들이 배우는 교훈을 배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는 상상의 세계 안에서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허구의 가치입니다. 허구는 우리가 가치를 실험할 수 있는 곳이며, 그것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허구는 우리의 지각을 형성하는 놀이가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입니다.

We place what we most value-the good whose discovery is our purpose; the destination that is the target of the moment—at the top, at the pinnacle, in the place of supremacy or sovereignty. We aim at the target we deem cen-tral, however momentarily. We focus on what we define as worthy of the expenditure of our attention and the efforts of our action. We posit a good— at least a good that is better than our point of departure. This is an act of faith as well as sacrifice: faith, because the good could be elsewhere, and sac-rifice, because in the pursuit of that good we determine not to pursue all others. Every perception is aligned with that initial and determining faith, while the decision that establishes the interpretive frame is itself a partial voyage toward the promised land of our aim, dependent as such perception is on action, which is the very constituent element of voyage. Our aim delineates around us a moral landscape, with the aim serving as the highest imaginable good, at least for the time and place made relevant by that aim. Again, aim gives the world its point, prioritizing and organizing even its per-ception. That aim reveals the pathway forward; the route we perceive as most likely to lead us to where we have determined to go. We see character, too, as aim. Character is aim embodied, the habitual pursuit of aim. That is the point of someone's action.

우리는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발견해야 할 선(good), 현재 목표로 삼고 있는 목적지—최고의 위치, 주권과 통치의 자리에 둡니다. 우리는 순간적일지라도 중심적이라 생각되는 목표를 겨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의와 행동의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정의한 것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최소한 출발점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겨지는 선을 상정합니다. 이것은 믿음이자 희생의 행위입니다. 믿음은 그 선이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희생은 그 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모든 것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은 그러한 초기의 결정적 믿음과 일치하며, 해석의 틀을 세우는 그 결정은 약속된 땅을 향한 여정의 일부입니다. 이는 그러한 지각이 본질적으로 행동, 즉 여정의 필수 요소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주변에 도덕적 풍경을 그려냅니다. 이 목표는, 적어도 그 목표가 관련성을 부여한 시간과 장소에서는, 상상 가능한 가장 높은 선으로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목표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목표는 세상의 지각 방식까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조직합니다. 목표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드러냅니다—우리가 가기로 결정한 곳으로 가장 잘 이끌어줄 것으로 보이는 경로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성격(character)**도 목표로 봅니다. 성격은 목표가 구현된 것이며, 목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습관적 행동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행동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고 행동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타인의 본질적 성격까지 정의합니다. 목표는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자, 그 과정에서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This all begs several very important questions: If we do and must see the world through a story; if the world reveals itself to us in the form of a story— what is that story? How do we properly characterize our aims, our most profound temptations, our most admirable upward strivings? What is relevant and what can and should be ignored? To what should we devote our costly attention? To what ends should we aim our action? What uncomfortable truth is our conscience eternally attempting to reveal? What is the appropriate hierarchy of value through which the world most productively, generously, and sustainably reveals itself? What, in other words, is the story, the true story of our lives—-what is it, and what should it be? It is an account of our highest aspirations, our most fundamental relationship, and, simultane-ously, of the true ground under our feet. It is therefore and must be the characterization of the divine itself, of God, just as the biblical accounts insist. And what is this?

이 모든 질문은 매우 중요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을 이야기의 형태로 보고, 반드시 그렇게 봐야 한다면,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우리의 목표, 가장 깊은 유혹, 가장 숭고한 상승 욕구는 어떻게 올바르게 특징지어야 하는가? 무엇이 관련 있고, 무엇을 무시해야 하며, 무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주의(attention)**를 어디에 헌신해야 하는가? 우리의 행동은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의 양심이 끊임없이 드러내려 하는 불편한 진실은 무엇인가? 세상이 가장 생산적이고, 관대하며, 지속 가능하게 드러나는 적절한 가치의 위계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의 진정한 이야기는 무엇인가—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가장 높은 열망, 가장 근본적인 관계, 그리고 동시에 우리 발밑에 있는 진정한 기반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신성(divine), 즉 하나님에 대한 특성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성경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최고의 선(Goodness)을 향한 우리의 열망, 진리를 위한 희생, 불완전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투쟁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 더 나은 것을 위해 자신을 재구성하려는 노력, 그리고 신성한 질서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갈망을 드러냅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동시에, 우리가 서로와 스스로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모든 도덕적, 심리적, 사회적 프레임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며, 우리가 지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근본을 제공합니다.

결국,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신성한 질서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세상과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며, 우리의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Conscience, important as it is—the conscience that makes itself manifest to Elijah-is not the only manifestation of God; not His only dramatic persona. He appears also, as we shall see, as a calling-inspiration, adven-ture, enthusiasm, curiosity, even temptation-in another of His primary guises, and as much more. We most profoundly wish to meet, and if possible to become, the hero, for example (another guise) — and not just the hero but the hero of all heroes. We want to take on the mien not just of the king; master of his domain, but of the king of kings. We are constituted so that we admire the divine principle of sovereignty itself. We want that so we can take on the perspective of the spirit properly put in the highest of places and experience the world through his eyes. We want to do this so we can ourselves adopt that stance of heroism and responsible kingship toward the problems that beset us and offer us opportunity in our own lives. We want to under-stand, as profoundly as we are able, the nature of the Good that stands behind all proximal goods-the Good who brings about the compelling life more abundant than is the true garden of eternal desire. We want to identify, likewise, the Villain who stands behind all acts of villainy—the nature of the spirit who wishes to produce all the suffering of the world for the sake of nothing but all that suffering. We want to understand Good so that we can be good and understand Evil so that we can avoid being evil. In this way we can bring about the salvation and redemption of the world, in small ways and great. We can constrain the hell that evil produces, and not just for ourselves but for everyone we care for and love, for the stability and continuance of the societies that we inhabit, and for the love of the world itself.

양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엘리야에게 드러난 양심은 하나님의 한 모습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다른 **극적인 모습(dramatic persona)**으로도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이를 곧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름(calling)으로, 영감으로, 모험으로, 열정으로, 호기심으로, 심지어 유혹으로도 나타나십니다. 또한, 우리는 가장 깊은 차원에서 영웅을 만나기를, 가능하다면 그 영웅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단지 영웅만이 아니라 모든 영웅들의 영웅을 동경합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영역을 다스리는 이 아니라, 왕 중의 왕의 모습과 태도를 갖추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주권(sovereignty)의 신성한 원칙을 존경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을 통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바르게 놓인 영혼의 관점을 취하고, 그의 눈으로 세상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닥친 문제들과 기회를 영웅적이고 책임감 있는 왕의 태도로 맞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든 가까운 선(proximal good)들 뒤에 서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최고의 선(Good)**의 본질을 가장 깊이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그 선은 참된 삶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존재이며, 영원한 열망의 정원이라 불릴 수 있는 삶을 실현하게 하는 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악행 뒤에 숨어 있는 **악의 본질(Villain)**을 식별하기를 원합니다—그 악은 단지 고통 자체를 위해 세계의 모든 고통을 만들어내려는 영적 힘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선(Good)을 이해해 선해지길 원하고, 악(Evil)을 이해해 악을 피하길 원합니다.

이 방식으로 우리는 세계의 구원(salvation)과 구속(redemption)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작은 방식이든 큰 방식이든. 우리는 악이 만들어내는 지옥을 억제할 수 있으며, 이는 단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보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우리가 속한 사회의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악을 억제하고 선을 실현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주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한 사명이며, 삶의 가장 깊은 의미를 드러내는 여정입니다.

For better or worse, the story is the thing— and for better or worse, the story on which our western psyches and cultures are now somewhat fragilely founded-however fragile they've become-is most fundamentally the story told in the library that makes up the biblical corpus, the compilation of drama that sits at the base of our culture and through which we look at the world. This is the story on which Western civilization is predicated. It is a collection of characterizations not only of God, whose imitation, worship, or, indeed, embodiment is held to be the highest of all possible aims, but of man and of woman, whose characters are held to exist in relationship to that God, and of society, in relation to the individual and the divine. It is, as well, the revelation of the sacrifice that makes such aim possible, and an examination in dramatic form of the transcendent target that is held to unite all things in the best possible manner. The biblical story, in its totality, is the frame through which the world of facts reveals itself, insofar as the West itself is concerned: it is the description of the hierarchy of value within which even science itself (that is, the science that ultimately pursues the good) is made possible. The Bible is the library of stories on which the most produc-tive, freest, and most stable and peaceful societies the world has even known are predicated- the foundation of the West, plain and simple. The landscape of the fictional is the world of good and evil-the world of value, with its pinnacle ever receding into the promised land itself, and the eternal pit of abysmal and infinite suffering occupying the lowest of possible places. The biblical stories illuminate the eternal path forward up the holy mountain to the heavenly city, while simultaneously warning of the apocalyptic dangers lurking in the deviant, the marginal, the monstrous, the sinful, the unholy, the serpentine, and the positively demonic. God, in this formu-lation, is the spirit that leads up. Man is the being who struggles with that spirit with every decision, because a decision is a matter of prioritization; with every glance, as every glance is a sacrifice of possibility toward some desired end, and with every action as he moves toward some destination and away from all others. At every moment of consciousness, we are fated to wrestle with God.

좋든 나쁘든,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그리고 좋든 나쁘든, 우리의 서구적 심리와 문화가 현재 어느 정도 위태롭게라도 기반을 두고 있는 이야기는—얼마나 취약해졌든 간에—근본적으로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도서관과도 같은 이야기의 모음집으로, 서구 문명의 토대가 되는 동시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입니다.

이 이야기는 서구 문명의 기반이 됩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묘사—그분을 모방하고, 숭배하며, 나아가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 가장 높은 목표로 여겨지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만이 아닙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과 여성, 그리고 개인과 신성(divine)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한 목표를 가능하게 하는 희생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최선의 방식으로 통합할 수 있는 **초월적 목표(transcendent target)**를 극적인 형식으로 탐구합니다.

성경의 이야기 전체는 사실의 세계가 드러나는 틀을 제공합니다—적어도 서구 세계의 경우 그러합니다. 성경은 가치의 위계를 설명하며, 이 위계 속에서 과학조차—최고의 선(the good)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과학—가능해집니다. 성경은 세계가 경험한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자유로우며,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사회들의 토대입니다. 그것은 서구의 기초이며,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입니다.

허구의 세계선과 악의 세계, 가치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의 정점은 계속해서 약속의 땅을 향해 물러가고, 가장 낮은 자리는 끝없는 고통의 심연과 절망의 구렁텅이가 차지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거룩한 산 위로 올라가는 영원한 길을 비추는 동시에, 비행(deviation), 주변적(marginal), 괴물적(monstrous), 죄악(sinful), 불경(unholy), 뱀 같은(serpentine), 악마적(demonic) 요소들 속에 도사리는 묵시적 위험을 경고합니다.

이 맥락에서 하나님은 **위로 이끄는 영(spirit that leads up)**이며, 인간은 그 영과 매 순간 씨름하는 존재입니다.

결정(decision)이란 우선순위를 정하는 문제이기에, 매 순간의 결정은 하나님과의 씨름입니다. 매 순간의 시선은 가능성을 포기하고 어떤 목표를 향해 집중하는 희생이기에 씨름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다른 모든 곳에서 멀어지는 행위이기에 씨름입니다.

매 순간의 의식(consciousness)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씨름하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이 씨름은 우리의 목표, 가치, 행동을 정의하며,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방식이 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우리"(We who wrestle with God) - 세미한 소리 Foreshadowing : The still, Small voice (2024)
Top Articles
Latest Posts
Recommended Articles
Article information

Author: Delena Feil

Last Updated:

Views: 5958

Rating: 4.4 / 5 (45 voted)

Reviews: 84% of readers found this page helpful

Author information

Name: Delena Feil

Birthday: 1998-08-29

Address: 747 Lubowitz Run, Sidmouth, HI 90646-5543

Phone: +99513241752844

Job: Design Supervisor

Hobby: Digital arts, Lacemaking, Air sports, Running, Scouting, Shooting, Puzzles

Introduction: My name is Delena Feil, I am a clean, splendid, calm, fancy, jolly, bright, faithful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